[알렉+파우] 이리하여 왕은, 자신을 위한 구세주를 만드노니
촛불빛 흩날리는 추억의 오블리가토 기반 날조

알렉 그랑벨은 한쪽밖에 남지 않은 팔로 칼을 들었다. 이제는 국보가 되어버린, 보석이 박히고 예리하게 세공된 보검이 아니라, 막 기사단에 들어온 일반 병사들에게 보급될 것 같은 조잡한 쇠칼이었다. 그렇지만 삭은 밧줄은 힘없이 잘려 땅으로 늘어졌고, 두 개의 밧줄이 모두 잘려 나가자 공중에 매달려 있던 나무판자가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떨어진 나무판자를 맞고 땅에 피어있던 보랏빛 꽃잎이 잠깐 휘날렸다. 알렉 그랑벨은 그 꽃잎들을 피하듯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걸어 나가서는 그대로 판자를 발로 들어 올리고는 검으로 쳐냈다. 칼등에 맞고는 강을 향해 떨어졌다 이미 옹이가 썩어들기 시작한 그것은 물에 뜨지도 못하고 그대로 맑은 물 아래로 가라앉았다.

 

나무와 밧줄은 썩어 떨어질 정도의 시간이 흘렀고, 사람은 늙는다. 고작 몇십 년이 지나도 늙어버린다. 알렉 그랑벨은 더는 나무 위에 올라가 새로운 밧줄을 엮어 그네를 내릴 수 없는 제 팔을 내려다보았다. 팔 하나가 없는 몸. 더 이상 올라가도 내려오는 자신을 받아줄 마법사도 없는 몸. 단순히 제 몸의 한구석이 사라진 것보다도 제 영혼의 반절이 사라진 것이 언제나 가슴을 시리게 하며 환상통을 자아냈다. 그네가 남아있다면, 어쩌면 머나먼 미래에는 마법사와 인간의 아이가 사이좋게 놀 수도 있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파우스트가 그 미래를 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미래는 단절되고 사라졌다. 자신이 없앴다. 불태워 버렸다. 많은 이들이 죽었다. 이것은 단순한 사실의 기술이다. 인간은 이 나라에서 마법사를 절멸시켰다. 그 본보기로 혁명군 마법사의 수장 파우스트 라위니아를 불에 태웠다.

 

알렉은 그것을 금방 후회했다. 그렇기에 파우스트의 처형 이후 그의 마나석이 제대로 발견되지 않았으므로 수색해야 한다는 잡음을 무시했다. 그만, 그 이야기는 더 듣고 싶지 않아. 불이 제대로 붙는 걸 봤잖아. 비명에 가깝게 성을 내며 말하는 젊은 왕에게 이견을 낼 자는 없었다. 인간의 입장에서 그는 어디까지나 소꿉친구 마법사에게 배신당한 안타까운 혁명 영웅, 시대의 총아였다. 사람들은 서서히 그의 앞에서 마법사의 이야기를 꺼내지 않게 되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알렉은 파우스트의 마나석에 대해 떠올렸으나, 그가 죽었다고 생각하고 싶었다. 차라리 그대로 기억 속의 너를 추억하는 것에 그치고 싶었다.

 

그렇지만 부랑자처럼 제 왕궁에 나타난 레녹스 램을 보았을 때, 알렉 그랑벨은 두 가지 사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는데, 하나는 그때 파우스트는 죽지 않았다는 점이었고, 또 하나는 이제는 죽었을 거란 점이었다. 레녹스는 그 처형의 날부터 사흘이 지난 순간부터 삼십 년간, 그를 찾아 헤맸다고 했다. 그가 파우스트를 찾는다는 말에, 알렉은 어느 유성우의 밤, 자신이 그에게 파우스트를 잘 부탁한다고 건넸던 말을 떠올렸다. 좋겠다, 나의 일생은 짧으니까. 별에 운명을 겹쳐 보는 마법사들의 마음은 알 수 없어. 그저 동경할 뿐이야……. 그것을 성실히 이행해 주고 있는 그에게 미안한 짓을 해버렸다고 생각하면서도, 알렉은 그가 이대로 자신을 죽이지 않을까 긴장하며 검집에서 손을 내리지 못했다.

 

레녹스는 계속하여 파우스트를 찾을 것이라고 했다. 피가로 님이라면 알지 않을까? 자기 입에서 나온 말을 자신도 믿을 수 없었다. 피가로 가르시아, 파우스트의 스승을 자신은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상대 역시 자신을 좋아하지 않았으므로 되려 서로 어느 측면에서는 편하게 대할 수 있던 사이였다. 레녹스는 주저하다가, 북쪽 나라에도 가보았지만, 그분의 성은 비어있었습니다, 하고 답했다. 그렇게 답하는 레녹스의 처진 눈썹은 정말이지 곤란해 보였다. 그는 길을 잃은 어린 양이었다. 자신을 이끌어 줄 목자도, 신도 모두 잃어버렸다. 그래서 하나 남은 자신에게 온 것이 아닌가, 라는 확신이 들었을 즈음 겨우 알렉은 칼집에서 손을 뗄 수 있었다. 이곳에는 파우스트 님이 없단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을 그가 이곳에 온 이유는, 그나마 이곳에는 자신이 있을 것이 확실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레녹스가 자신을 해칠 리 없었다. 그렇다면 그는 마지막 북극성마저 잃어버리게 될 것이기에.

 

이곳은 이제 조용하네요. 모두가 그날을 잊은 것 같습니다.

 

레녹스는 그 한마디를 남기고 다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어쩌면 앞으로도 레녹스는 파우스트를 찾을지도 몰랐다. 아마 우직한 그의 성정을 생각하면 그럴 확률이 높았다. 어리석고 충실한, 우리의 레녹스. 그렇기에 알렉은 그의 말을 듣고 나서야 어딘가 안심했다. 레녹스에게 말하지는 못하였지만, 파우스트는 죽었을 것이다. 마력도 안정되지 못하는 몸으로 치료도 받지 않고 도망친 마법사가 살아있을 리 없다. 그를 태우던 불이 아직도 알렉의 눈꺼풀 너머에 선명했다. 그 불에서 살아남았다 하더라도, 금방 도망쳐버린 그가 살아있단 것은 기적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리고 알렉은, 이제 인간의 나이로 중년을 향하기 시작한 그는, 노란색 꽃잎이 흔들리던 첫 만남의 기적도, 보랏빛 꽃잎이 되어 휘날리던 바람도 더는 믿지 못했다.

 

그러므로 알렉은 속죄하기로 했다. 속죄를 기만이라 받아들일 당사자는 더는 이 세상에 없었다. 그렇다면 그를 추모하는 것을 통해 그에게 알량한 속죄를 남길 수 있었다. 그 역시 기만이고 오만이라 하더라도 어떡하겠는가.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을! 알렉 그랑벨은 역사를 다시 쓰기로 했다. 없던 일로 만들 수 없다. 하지만 인간의 기억과 마음은 왜곡되고 일그러지는 것이었다. 제가 그 산증인이 아닌가. 사랑하는 마법사를 향한 기억도, 추억도, 마음도 왜곡되고 일그러져서 그를 태워버리지 않았는가. 알렉은 파우스트를 상징으로 빚어내기로 했다. 마침, 이 나라에는 종교가 필요했다. 불경하게도 마치 오후의 차를 고르듯 종교를 택하려 했던 알렉은 그 자리에 제 소꿉친구를, 제 영혼의 반쪽을 집어넣기로 했다. 필요와 욕망이 교묘하게 결합하여, 알렉이라는 화가의 손 아래, 성스러운 마법사 파우스트 라위니아가 그려졌다.

 

처음은 기록이었다. 마법사 처형과 관련된 기록물을 불태웠다. 왕의 기행에 서기관들은 비명을 질렀다. 반대하며 제 몸을 기록물과 함께 태워버리라고 한 서기관들도 있었다. 그들에게 알렉은 먼 지방의 관직을 내렸다. 실질 구금에 가까운 조치였지만, 그들은 죄가 없었으니까 그 정도에 그쳤다. 그러나 어떤 자들은 죄가 있었다. 처형과 관련하여 관직을 얻은 자들이 있었다. 제 귀에 독을 흘러 넣고 제 눈을 가린 자들이었다. 그들은 하나둘씩 이유 모를 병에 쓰러져 갔다. 혹은 억울하다는 목소리를 무시하며 파면시켰다. 다시는 성도를 밟지 못하는 퇴출형을 받은 자도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땅이었다. 실체를 가진 자는 신앙이 될 수 없었다. 상징이 되기 위해서는 그 껍데기를 태워야 했다. 실존으로서, 생물로서 그가 살아가던 공간은 그의 상징성을 옅게 만들었다. 지속되지 못하게 만들 것이었다. 그러므로 알렉 그랑벨은 먼저 자기 고향을 불태웠다. 영혼의 반쪽마저 불태운 자에게 그것은 용이한 일이었다. 어차피 제 꿈은 이미 좌절되었다. 혁명이 끝나고, 파우스트와 고향에 돌아가서 느긋하게 지내고 싶어……. 어린 자신의 어리석은 말을 반추하면 헛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속죄를 위해 후회를 겹겹이 쌓아가는 것만 같았다. 숲을 태우던 불길은 며칠 만에 잦아들었다. 그곳은 이제 무엇도 자라지 못하는, 어떤 인간도 어느 마법사도 자라지 못하는 불모의 땅이 되었다. 시작이 사라졌으니, 끝도 사라져야 했다.

 

고향을 시작으로 하여, 알렉은 파우스트와 지나온 모든 공간을 다시 찾았다. 그중 하나가 이 그네였다. 알렉은 고개를 들어 나뭇가지에 엉성하게 매달린, 끝이 잘린 밧줄을 올려다보았다. 팔을 뻗어 밧줄 끝을 만졌다. 밧줄을 엮어준 것은 파우스트였고, 그것을 자신이 매달았었다. 이제 정말로 파우스트가 남긴 것은 제게 남은 몇 개의 성로의 젬과 이 잘린 밧줄뿐이었다. 성로의 젬은 이제 빛을 거의 다 잃었다. 이 밧줄도 분명 이대로 두면 십 년도 버티지 못하고 삭아 떨어지고, 땅으로 환원되어 보랏빛 꽃들의 비료가 될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분명 영원한 순환 속에서, 그는 하나의 상징이 되어 영원을 살 것이었다.

 

……그렇지만 과연 이것을 속죄하고 할 수 있을까. 결국 자신은 또 속죄란 이름으로 제 소꿉친구 파우스트 라위니아를 다시 태워버린 것은 아닌가.

 

보랏빛 꽃잎이 바람을 타고 이제는 있을 리 없는 알렉의 오른팔을 쓰다듬었다. 알렉 그랑벨은 여전히, 욱신거리는 환상통 속에 갇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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